페르난도 아리발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나에게 무한의 새로운 경험을 심어주는 연극과 인생이라는 강의에 대한 감사의 말을 먼저 하며,
이 역시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연극공연이였다. 20분정도 일찍 온 나는 무대에 설치된 소품을 보며 강의시간에 봤던 메튜본의 백조의 호수가 생각났다.
가운데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있어 그랬던것 같다. 그리고 내용부분에서도 비슷한 점도 있는것 같다. 엄마라는 너무 강력한 존재와 자신의 사랑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
이렇게 엮어보니 더욱 설레기도 하고 신기함이 가득했다. 내가 이런 극장, 영화극장이 아닌, 무대가 있는 극장에서 보는 극이나 어떠한 공연같은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MBC홀에서 봤던 둘리의 대모험 이후로 처음이다. 나무바닥같은 무대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말을 하고 노래를 하고 그러한 것들만 본적이 있지 나는 극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영상물로도 본적이 없어 오늘 실제로 처음봤는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봉림 소극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나는 더 큰 곳일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아서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우리가 본 장엄한 예식은 동선이 그리 길지가 않아 딱 맞는 규모의 무대여서 보는데에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나는 무대 모든곳을 잘 보기 위해 뒷부분 중간에 앉아서 보았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넓게 잘 보이는 자리에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TV나 영화같은 녹화영상에 익숙해져있는 나는 배우들이 가까이 보이지 않는게 너무 답답했다. 말할 때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 그게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발음이 엄청 또박또박해서 이해하는데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너무 앞쪽에 앉으면 배우들의 모습은 잘 보이겠지만 주변 배경들이 보이지 않아 많이 답답해할것 같아서 그러한 선택을 한건데 잘한건지 잘못한건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관도 너무 앞에 가서 보면 목이 아프듯, 극도 그럴줄 알았기에 맨앞자리느 앉지 않았다. 예약석이라고 앞에서 두번짼가 세번째 자리가 참 좋아보였는데 아쉽긴 하다.
그리고 두번째는 조명이다. 조명이 너무 신기했다. 기계적인 느낌이 아닌 조명감독이 있어 하나하나 켜주는 그 수동적인 느낌이 요즘같은 영상매체에선 느낄 수 없는 비기계적인 느낌이였다. 배우들이 가는곳으로 조명이 켜지고 말을 하지 않거나 자신의 파트가 없을땐 자신의 조명이 꺼진다. 조명도 느낌이 매우 다양했다. 굉장히 환한 하얀빛의 조명과 누런 조명, 하얀빛과 누런빛의 사이에 있는 조명들이 각도를 달리 하며 켜지는것이, 비춰지는것이 너무 신기한 느낌을 줬다. 그런 조명 아래 서서 연기를 하는 사람들의 기분은 왠지 엄청 좋을 것 같다. 조명으로 밝아진 배우 자신들에게 사람들의 집중된 시선들이 따스히 그들에게 스며들어오는듯한 기분일것이며, 그들을 감싸고 있는 조명의 온도가 살갗에 닿아 마치 사람들의 시선을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명으로 변한 자신의 피부색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집중이 녹아들어 있는 것 같고 그러히 녹아든 관심과 집중은 배우가 연기를 더욱 잘 할 수 있겠금하는 포도당 링겔같았다고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발성이 나의 귀를 자극했다. 마이크에 인풋을 해 엠프나 스피커로 아웃풋이 되는 소리만 듣던 나는 그들의 육성이 극장안에 울려퍼지는게 엄청난 떨림을 주어 굉장히 인상깊었다. 나는 무슨 목소리가 저렇게 클까 하며 그들의 옷이나 몸에 행여나 마이크가 부착되어 있나 멀리서 자세히 살펴보긴 했는데 마이크를 발견할 수 없었던것 같다. 그 말인 즉슨, 그 배우들은 자신의 순수 육성으로 대사를 내뱉고 있었던 것이였다. 목소리가 또랑또랑하고 매우 커서 깜짝 놀랬다. 맨날 스피커로 아웃풋되는것들만 듣다가 육성으로 이리도 폐쇄적이고 가까운 곳에서 듣게 되다니, 천장이 뚫려 있는 고대 그리스 극장에선 대체 어떻게 소리가 울려퍼져 그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듣는건지 아직도 신기하다. 이론적으로 그렇다한들 나는 직접 겪어보지 못해 정확히 이해 할 수가 없어 너무나도 아쉽다. 하지만 오늘은 비록, 천장이 있긴 하지만 고대 그리스 극장과 조금은 흡사한 봉림극장에서 이러한 연극을 본 것은 굉장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명이 다 꺼지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막이 넘어갈 때 조명이 모두 꺼지면 나는 무대쪽에 엄청 집중을 해서 쳐다보았다. 새까만 무대에서 내가 발견한것은 형광연두색의 점같은것들이였다. 네이버에 뭐라고 검색해봐야할지는 모르겠다만 그게 전자적인것인지 아니면 일반 형광 스티커같은 것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것들로 배우들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어둠속에서도 척척 행동하는듯 해 보였다.
그리고 실제 극장에서 보니 소리와 여러가지 시각적인 각도 말고도 후각적인 부분도 빠질 수 없었다. 까바노자가 촛불을 켤 때 라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성냥을 사용했다. 난 당연히 라이브인 극에서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라이터가 더 편할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촛대 밑에는 성냥이 가득했다. 그러고 단번에 성냥 하나로 촛불 하나에 불을 붙인다. 촛불에 불을 붙여주고 써져버린 성냥의 탄 내가 5초후에 내 코를 찔렀다. 시각, 청각적인 요소만 있던 그러한 공간에서 후각적인 요소가 가미될줄은 생각도 못했기에 그 성냥이 꺼져버리고 탄내가 나는 순간 내 머리에 화살이 꽂힌마냥 경작되었다. 경직된 상태로 그 장면을 집중했다. 성냥은 굉장히 작은것이지만 큰 자극을 불러 일으켜 극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어 꽤나 신선했다. 앞으로 집중을 할 때엔 탄내가 필요할것 같은 우스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극장 마루 바닥이 나무바닥인듯 하던데 배우들이 걸어다닐때마다 다는 발자국 소리가 너무 생동감있어서 듣기 좋았다. 난 개인적으로 도서관에서 구두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적막한 도서관에서 똑똑 구두발자국 소리가 나면 굉장히 예민해지고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극장에서 나는 구두발자국 소리는 생동감과 그 극장 자체에서 울리는 구두소리는 둔탁하여 나에게 조금은 안정된 느낌을 주는것 같아서 듣기가 좋았다. 그래서 마마가 걸어다닐 때 나던 구두소리는 둔탁해서 내 마음의 안정을 주는 소리같았지만 그 구두소리엔 까바노자에 대한 강렬한 지배욕이 스며들어간 걸음거리 소리여서 강력한 소리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극장에 대한 하나하나의 요소들은 내게 있어 아주 신기했다. 연극의 시작에 앞서 교수님이 연극은 그리 어려운것이 아니라며 편안하게 모든것을 내려놓고 이 상태 자체를 즐기라고 하셨을 때 나는 강박관념들을 버리고 오직 내 수준에서 보이는 것들을 쉽게 쉽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아니 노력이라고 표현하기보단 그냥 숨쉬듯 연극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원래 뭐든 처음하는것들에 대해 긴장을 하기 마련이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긴장까진 하지 않고 굉장히 편안한 마음으로 봤다. 그래서 솔직히 이야기 하면 초반 부분에서 까바노자와 마마가 장황한 대화를 이어갈땐 조금 잠이 오기도 했다. 허나 편안한 마음으로 보니 우선 시각적인 것들에 대해 많은 자극을 받게 되었고 그 다음은 청각 , 그다음은 스토리인것 같다.
처음본 연극 치곤 너무 자극적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자극적이라는 의미는 외설적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고 상당히 엽기적이였다. SM부분이 나올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 말이다. 좀 더 아름답고 밝은 내용이나 전체적으로 경쾌하고 즐거운 부분이 많아 절정은 있지만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그런 좀 더 일반적인(?) 내용의 연극으로 나는 나의 연극 경험을 시작할 줄 알았는데 언제까지나 밝고 즐거운 것들만을 섭취할 순 없는 법인것 같다. 한편으로 굉장히 자극적인 연극으로의 시작으로 내가 첫발을 내딪여 그런지, 앞으로 보게 될지도 모르는 연극들은 대게 이러한 분위기를 많이 가질것만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기는 조금 힘들것 같다.
내용을 생각해보면, 최근에 TV에서 본 엄마들의 사교육 열풍이 생각난다. 임신 전부터 엄청난 교육을 실시한다. 아주 엄청나게 비싼 사교육 뿐만 아니라 집에서 일반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태교부터 아이가 엄마의 젖을 먹을 동안 영어교육은 이미 시작되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 모두는 엄마의 손길 하나하나를 거치게 된다. 한국에서 강남 대치동 엄마라고 하면 너무나도 유명한 치마바람이다. 고등학교까지의 아이들의 모든 생활은 엄마의 손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지나면서 아이들은 수많은 억압속에서, 마치 까바노자처럼 자랄 수도 있지만 대게 대부분은 엄마의 손길에 익숙해져 엄마가 주는것들을 잘 소화해내어 잘 자라나는것 처럼 보인다. 옛날, 한 4~5년전만 해도 맹목적 고액과외, 무조건 공부만 시키는 엄마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다재다능한 인재를 부르는 시대여서 그런지 공부는 기본이요, 굉장히 여러가지 예술적인 부분에서도 많은것들을 접하게 해준다. 공부 이외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부모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런 달라진 면에서 보면 나는 사교육을 시킬 수 있으면 시키는게 정말 좋은것 같다. 물론 여건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무리한 사교육은 좋지 않지만 개개인의 발전 가능성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투자할 여건이 있다면 하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사교육과 장엄한 예식에서 나오는 마마의 손길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물론 같은 맥락이였지만 방향이 달라졌다. 마마가 까바노자에게 주는 이 이상한 사랑은 마마가 까바노자의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삐뚤어지고 과도하게 증폭되어버린 사랑과 집착이다. 아들의 동정이 사라지는것에 대해 굉장한 불편함을 느끼며, 아들의 동정은 반드시 마마의 손에서 때버리길 바라고 있다. 아들이 상처받지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마의 마음을 알겠지만 이미 뒤틀린 그녀의 모정은 더욱더 까바노자를 억압하고 퇴폐적으로 만든다.
생각해보면 이 둘의 복작한 관계는 나까지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과잉보호란 무엇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나는 그다지 과잉보호속의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 아니여서 한편으론 이러한 사람들의 관계가 매우 거북하고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얼마나 사랑하면, 얼마나 소유하고 싶었으면 이리도 억압하였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과잉보호하고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자존감이 부족해서인것 같다. 자기자신만의 세계가 확실하거나 자긍심이 높거나,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면 다른것에 대한 소유의 욕망이나 자신 이외의 것에는 그다지 억압하려 하지 않을것이다. 마마 역시 3막에 나왔던 리스처럼 천진난만한 소녀였겠지만 까바노자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모든것이 무너져버린다. 마마가 체스를 자꾸 두는것도 생각해보니 이러한 무너저버린 자신을 대신해 자신의 군단을 만들어 상대방에게 저항하는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것 같다.
둘의 문제는 모두 자신의 근본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이 둘의 관계 회복에 있어서는 서로가 서로의 역활이 무엇인지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으며 자기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정확히 알고 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참으로 엽기적인 연극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나는 까바노자의 성스러웠던 예식이 성공으로 끝났으리라고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그에게 박수를 보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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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처음 본 하나짱의 초등학생 견학문 정도의 레포트;;
연극은 나랑 안맞음 ^ㅇ^
생각해보니까 그 때 영영 교수님 오이디푸스 관계를 넘 좋아하신듯 . 레포트 절반이 근친 ㅠ..
이래서 영어영문학과은 왠지모르게 교양과목으로도 힘들다니까 ;-(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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